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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맥락 정리

조선총독부 첨탑이 내려간 1995년 8월 1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가 조선총독부 철거 과정을 다뤘다. 1995년 8월 15일의 첨탑 철거부터 1996년 11월 13일 완전 철거까지, 찬반 논쟁과 당시 발언이 함께 소환됐다.

조선총독부 첨탑이 내려간 1995년 8월 15일 — 모노라 편집부 codex hero
사진 · 모노라 편집부 (AI 생성)

1995년 여름 광화문 일대에는 5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들이 기다린 장면은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진 조선총독부의 첨탑 철거였다. 1995년 8월 15일, 8월 15일의 철거는 단순한 건물 해체가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둘러싼 역사 논쟁의 한 장면으로 다뤄졌다.

철거를 두고는 찬반이 맞섰다. 치욕적 역사를 교훈으로 남기고 일제 만행의 증거로 보존하자는 의견,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건물을 부수는 일이 맞느냐는 의견, 70년 동안 4번 주인이 바뀐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건물을 보존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철거 반대 의견이 과반 이상이 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조속한 철거를 지시했다. 그는 “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보존해야겠지만 민족적 치욕의 상징물도 문화재라 할 수 있냐”라고 말했고,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개혁할 수 없다”라는 입장으로 철거를 주장했다.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세워진 건물이었다. 건설 기간은 11년, 건설 비용은 1800억 원이었다. 조선인들의 노동력과 조선의 자재가 동원됐고, 선원전이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의 부엌 겸 창고로 팔려나간 사례도 언급됐다.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전 건물수 총 509동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친 뒤 남은 건물수 36동이 됐고, 90%가 넘는 건물이 매각되거나 철거됐다.

일본은 조선총독부 앞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광화문도 없앴다. 경복궁의 중심축과 총독부의 중심축은 어긋나게 설계됐고, 3. 75도를 틀면 남산을 향했다. 당시 남산에는 일본의 신을 모시는 조선신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철거 결정 뒤에도 작업은 곧바로 끝나지 않았다. 첨탑이 먼저 제거된 뒤 1년간 철거가 진행되지 않았고, 당시 조선총독부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었다. 50미터 거리의 고궁 박물관으로 임시 이전이 결정됐지만, 많은 유물을 훼손 없이 옮기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전 과정에서는 건물 지하에서 철문 두께가 14cm에 이르는 감금 시설이 발견됐다. 밖에서 거는 잠금장치와 감시창이 있었고, 공간 곳곳에서는 고문의 흔적도 확인됐다. 이 시설은 당시 일본이 조선을 어떤 시스템으로 통치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다뤄졌다.

조선총독부가 사라지기 전 이를 보려는 일본인들도 한국을 찾았다. 일본 총무성 장관은 “일본은 한일 합방을 통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창씨개명도 강제로 진행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에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버리겠다”라고 맞섰고, “역사에 대해 내가 관용을 베풀 이유는 없다”라고 밝혔다. 첨탑 제거 11개월 후 본격 철거가 시작됐고, 조선총독부는 1996년 11월 13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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